33억. 국내에서 한 해 소비되는 라면의 개수다. 국민 한 사람이 1년에 평균 70개를 소비한다. 일주일에 1개 이상을 먹는 셈이다. 가위 ‘국민 식품’이란 말이 어울릴 정도다. 국내에 라면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60년대 초반. 지난 5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라면은 우리 생활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식품으로 자리 잡았다.
박혜민 기자
[중앙포토]
국내에서 판매되는 라면의 종류는 200개가 넘는다. 시장 규모는 1조9000억원에 달한다. 라면을 생산하는 업체는 모두 4개. 농심·삼양식품·오뚜기· 한국야쿠르트다. 농심이 시장점유율 70%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다.
냉장 유통되는 생면류를 제외하고 라면은 대부분 개당 1000원 안팎의 저렴한 가격이다. 그래서 서민 음식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최근 1600원대의 프리미엄 라면으로 출시된 ‘신라면 블랙’이 결국 국내 생산을 중단한 것도 이 같은 인식 때문이었다. ‘라면은 싸다’는 인식의 벽을 넘지 못한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라면은 농심의 ‘신라면’이다. 그 다음은 ‘안성탕면’ ‘삼양라면’ 순이다. 상위 10위권은 대부분 80, 90년대에 등장한 라면들이 차지하고 있다. 상위 10위 라면들의 평균 연령을 따지면 22.6세가 된다. 하지만 최근 ‘꼬꼬면’의 선풍적인 인기로 정체한 국내 라면시장에도 변화의 바람이 불어올 것이란 기대가 커지고 있다.
1960년대 : 태동기
1963년 삼양식품공업주식회사가 일본에서 수입한 라면 기계.
국내에 등장한 첫 라면은 1963년 9월 15일 출시된 삼양라면이다. 당시 삼양식품공업주식회사가 정부의 자금 지원을 받아 일본에서 사들인 라면 기계 2대로 만들었다. ‘국민 보건 향상과 식량 자원 개발’이 당시 정부 자금 지원의 명목이었다. 식량 부족, 특히 쌀 부족이 심각해 혼·분식 장려운동이 벌어지던 시절이었다. 삼양라면의 첫 출시 가격은 10원, 중량은 100g이었다. 가격을 10원으로 책정한 건 서민층이 쉽게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커피 한 잔은 35원, 시장에서 흔히 팔던 서민 음식 꿀꿀이죽은 5원이었다.
첫 삼양라면은 지금보다 싱거웠고 닭고기 국물이었다. 일본의 명성식품과 기술제휴해 만든 제품이라 일본 라면과 맛이 비슷했다. 포장에도 닭이 그려져 있었다. 처음 사람들의 반응은 썰렁했다. 라면을 면 소재 천이나 실의 명칭이라고만 생각했다. 라면이 음식이라는 걸 알리기 위해 삼양식품은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시식행사를 벌여야 했다.
2호 라면은 65년 출시된 롯데공업주식회사(현 농심)의 ‘롯데라면’이었다. 이 라면은 닭 국물 대신 쇠고기 국물을 사용했다. 한국인들은 잔칫날 쇠고기 국을 먹는다는 점에 착안했던 것이다. 라면의 인기가 높아지면서 ‘해표라면’ ‘대표라면’ ‘해랑라면’ 등 경쟁 제품들도 쏟아졌다.
삼양식품은 72년에 국내 최초 용기면인 ‘컵라면’도 출시했다. 하지만 당시 생소했던 용기면은 80년대 후반에 와서야 대중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1970년대 : 성장기
삼양라면에 이어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제품이 바로 ‘농심 라면’이었다. 75년 출시된 농심 라면은 ‘형님 먼저, 아우 먼저’라는 광고 카피로 화제가 됐다. 농심(農心)은 ‘농부의 마음’이라는 뜻이다. 형과 아우가 밤에 상대의 논에 자신이 추수한 볏단을 몰래 가져다 놓는다는 내용의 전래동화 ‘의좋은 형제’에서 모티브를 딴 이름이다. 여기엔 당시 시대상황이 녹아 있다. 70년대 들어 급속한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농촌의 청년들은 도시로 몰려들었고, 이와 함께 푸근한 농촌 인심을 그리워하는 정서가 커졌다. 이런 정서를 파고든 것이 바로 농심 라면이었다. 이 제품의 인기로 롯데공업주식회사는 78년 회사명을 농심으로 바꾸고 라면 시장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80년엔 경기도 안성에 수프 전문공장을 착공해 수프 제조 공법을 발전시켰다.
1980년대 : 황금기
81년 ‘사발면’, 82년 ‘너구리’, 83년 ‘안성탕면’, 84년엔 ‘짜파게티’와 ‘팔도비빔면’이 연속 히트하며 라면 시장을 확 키웠다. 라면 시장 2위였던 농심이 삼양식품을 제치고 1위를 차지한 것도 이 때다. ‘오동통한 내 너구리, 너구리 한 마리 몰고 가세요’라는 카피로 인기를 끈 너구리는 우동의 면발을 재현한 라면이었다. 안성탕면이라는 이름은 농심의 안성공장에서 만들어진, 한국인의 ‘탕 문화’를 이어받은 라면이라는 뜻을 담았다. 한국인이 좋아하는 ‘시원하고 얼큰하며 개운한 쇠고기 장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짜파게티는 짜장면과 스파게티를 결합한 명칭으로 당시 스파게티가 고급 외국 음식으로서 국내에 알려지기 시작했던 점에 착안했다.
86년엔 신라면이 등장했다. 신라면은 매운 맛에 초점을 둔 첫 라면이었다. 이전에도 매운 맛이 나는 라면은 있었지만 여기에 초점을 맞추지는 않았다. 매운 맛을 강조하기 위해 포장에 강렬한 빨간색과 검은색을 사용했다. 이에 반해 88년에 나온 오뚜기 ‘진라면’은 초등학생들을 둔 주부들을 겨냥해 맵지 않게 만들었다.
80년대 후반에는 86년 아시안게임과 88년 올림픽을 계기로 용기면이 대중화되기 시작했다. 경기장에서 ‘사발면’ 등 용기면을 먹는 외국인들의 모습이 TV를 통해 비춰지면서 세간에 본격적으로 알려졌다. 생활이 바빠지면서 간편한 먹거리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진 것도 용기면이 인기를 끈 이유였다. 86년 한국야쿠르트가 도시락 형태의 용기면 ‘도시락’을 출시했고, 90년 ‘왕뚜껑’을 내놨다.
농심은 82년 선보인 ‘육개장 사발면’에 이어 89년 ‘새우탕 큰사발’, 90년 ‘튀김우동 큰사발’을 잇따라 선보였다.
한편 이른바 ‘쇠고기 우지 사건’으로 삼양라면은 89년부터 94년까지 삼양라면의 판매를 중지해야 했다. 라면을 만들 때 식용으로 쓸 수 없는 공업용 쇠기름을 사용했다는 혐의에 대해 검찰이 수사를 시작했던 사건이다. 7년9개월 간의 법적 분쟁 끝에 결국 대법원은 무죄 판결을 내렸지만 삼양식품은 한동안 공장 가동을 중단하고 1000여 명의 인원을 감축했으며, 시장점유율은 40%에서 10%로 추락하는 시련을 겪었다.
1990~2004년 : 성숙기
라면이 다양해지고 고급화됐다. ‘김치라면’ ‘생생우동’ ‘무파마탕면’ ‘수타면’ ‘스낵면’ 등 다양한 라면이 등장했다. 수타면은 97년 대법원으로부터 무죄 판결을 받은 삼양식품이 99년 의욕적으로 출시한 라면으로 쫄깃한 면발을 강조했다.
90년대 후반은 한국 라면의 해외 진출이 본격화된 시기이기도 하다. 농심은 96년 처음으로 중국 상하이에 공장을 준공했고, 98년 중국 칭다오, 2000년 중국 선양, 2005년 미국 LA에 공장을 설립했다. 신라면은 중국에서도 인기다. 신라면 포장에 쓰이는 빨간색과 검은색이 중국에선 약 포장재로 쓰이는 색깔이다. 이 때문에 건강에 좋고 고급스러운 고가 라면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농심의 해외 시장 매출은 4000억원이 넘으며, 전 세계 80여개국에서 라면과 스낵류를 판매 중이다.
2005~2011년 : 변화 모색기
국내 라면 시장은 2005년 이후 정체 상태에 놓여 있다. 삼각김밥 등 라면 외에도 먹을 만한 간식류가 늘었고, 라면의 주 소비층인 10~20대 인구가 감소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각 업체들은 다양한 고객들을 겨냥한 신제품을 내놓고 있다. 2009년 나온 농심의 ‘둥지 쌀 뚝배기’는 쌀의 함량을 90%로 높인 제품으로 이어 ‘쌀 짜장면’ ‘쌀 카레면’ 등 쌀을 재료로 한 제품들이 계속 등장했다. ‘미인국수 275’는 다이어트에 신경 쓰는 여성층을 겨냥했다. 면을 기름에 튀기지 않고 칼로리가 낮은 해산물 원료를 사용해 맛을 낸다. 중장년을 위한 ‘뚝배기 설렁탕’, 라면에 치즈를 넣어 먹는 젊은이들을 겨냥한 ‘보들보들 치즈라면’, 냉면 맛을 재현한 ‘둥지 냉면’, 분식집 주 메뉴인 ‘라볶이’ 등 셀 수 없이 많은 수의 라면이 등장했다.
하지만 신라면이나 삼양라면의 아성을 깨뜨릴 만한 제품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최근 한국 야쿠르트가 출시한 꼬꼬면의 경우 닭국물을 소재로 한 제품으로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는 중이다. 이와 함께 삼양식품이 출시한 흰색 국물 라면 ‘나가사키 짬뽕’을 찾는 사람도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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