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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닭큐멘터리 소설 <안개>1부. 시인 기형도, 거리에 흐르다

 

닭큐멘터리 소설 [안개]

1부. 시인 기형도, 거리에 흐르다


글. 닭큐
/
원작. 세린
Blog. http://doccu.tistory.com
닭큐데스크



※ 이 글은 세린님의 '나는 아직도 그를 만나지 못했다' 포스트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픽션입니다.


 

1.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이 깔깔거리며 지나간다. 긴 어둠에서 풀려난 무뚝뚝한 검은 굴뚝 사이로 흰 연기가 쉴 새 없이 새어나온다. 아이들은 이미 익숙한 듯 거친 공기를 심드렁한 표정으로 들이마시며 느릿느릿 새어나온다.






안양천은 아침마다 안개가 자욱하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조심스런 걸음을 옮기지만 곧 다른 사람들처럼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하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니 말이다.

“우성아! 학교 가야지!”
“네!”

엄마가 멍하니 창밖을 보고 있는 우성에게 소리치지만 우성은 건성으로 대답하고, 시선을 안양천 건너 공장지대에서 안개에 덮인 배추밭 사이 자그마한 집으로 옮긴다. 우성은 20분 전부터 앞집 대문을 뚫어져라 쳐다보지만 기척이 없다.

앞집 아줌마는 시장에 좋은 자리를 맡기 위해 새벽같이 집을 떠나셨을 거다. 요즘 시장에 널린 게 배추라 자리싸움이 치열하다. 뉴스에선 작년에 치른 서울올림픽으로 경제효과가 얼마네하고 떠들었지만 앞집 아줌마는 여전히 열무를 30단이나 짊어지고 새벽 같이 떠나신다. 가난은 지겹게도 우리와 너무나도 가까웠다.

안양천 안개가 짙은 날이면 10미터 앞의 사람도 잘 보이지 않는다. 우성은 눈에 힘을 주었다.

‘분명히 어제 형이 돌아왔다고 했는데…’

학교 갈 시간이 가까워 오자 초조해지는 마음을 감추기는 어려웠다. 그때 앞집 대문이 열리며 형이 나오는 모습이 보인다. 우성이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두 손에 노트를 꼭 쥔 채 재빨리 뛰쳐나간다.

“다녀오겠습니다.”
“조심해. 그러다 넘어져서 잘생긴 내 새끼 얼굴이라도 다치면 어쩌려구!”
"네! 네!"

마루에서 무청을 다듬던 엄마가 소리치지만 형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에 우성이는 얼굴 한 번 돌아보지 않고 엄마를 지나친다.

'엄마가 서운했을까? 아니겠지?'

우성이는 왠지 엄마가 신경 쓰였다. 시험 때만 되면 공부 못한다고 쫒겨나 복도를 교실처럼 이용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던 우성이지만 오늘은 무슨 일인지 사소한 것 하나 하나가 신경 쓰인다. 이상한 날이다.

“형! 형! 형도 형!”






짙은 안개 속에 어슴푸레 보이는 물체를 향해 우성은 큰소리를 질러본다. 오늘 형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는데 형은 잘 안 들리는 모양이다. 잠시 후 마을에 한 대밖에 없는 버스가 우성이의 외침을 먹어치우며 거친 소리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헉. 헉. 저 버스는 꼭 이럴 때만 일찍 나타난다니까.”

우성은 난데없이 나타난 버스를 원망하며 더 빠르게 달렸다. 정류장이 눈앞에 보였다. 형도 형이 버스에 막 오르려던 참이다. 우성은 숨이 차서 쥐어짜는 목소리로 형도를 불렀다.

“형도 형. 나 형한테 할 말 있다니까!”

형도는 우성의 목소리가 들렸는지 잠시 뒤를 돌아보았지만 이내 고개를 돌리고 버스에 올랐다. 안개는 우성을 삼키고, 이내 버스 반쪽을 잘라낸다.


두 달 뒤 그 일이 터졌다. 그의 장례식은 거센 비바람으로 온통 번들거렸다. 죽은 그를 실은 차는 참을 수 없이 느릿느릿 나아갔다. 사람들은 장례식 행렬에 악착같이 매달렸고, 백색의 차량 가득 검은 잎들은 나부꼈다.





 





2.


벌써 20년이 더 지났음에도 그 때의 기억이 생생하다. 우성은 낡아빠진 노트를 덮고 시계를 보니 벌써 8시다. 팔을 쭉 뻗어 가볍게 스트레칭 하고 일어나 냉장고를 열어 찬 오렌지쥬스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간단하게 샤워하고, 평소와 같이 ‘페레로 로쉐 초콜릿’으로 가볍게 머리와 위장을 깨운다. 우성은 초콜릿을 정말 좋아한다. 달콤함은 우성의 얼굴과 매우 잘 어울렸다.

우성은 몽블랑 시계를 손목에 채웠다. 400만 원이 넘는 이 시계는 직선과 곡선의 매끄러운 조화로 꽤 두터운 마니아그룹을 가지고 있다. 세밀한 디자인은 물론이다. 한 가지 흠이라면 친구에게 돈 떼이고 받은 시계라는 거다.

우성은 그 놈만 생각하면 아직까지 화가 치민다. 한 몫 잡을 생각으로 서울 가서 PC방 차린다는 친구에게 큰 돈을 빌려주었다가 1년 새 주변에 PC방이 세 곳이나 더 생겨 함께 망해버렸다. 그래도 친구라며 미안하다고 준 게 이 몽블랑 시계다. 하지만 오늘 같은 날엔 제법 비싸고, 고급스러워 보이는 시계를 차야 한다. 오늘은 우성에게 조금 특별한 날이기 때문이다.

우성은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렸다. 남들은 지하철로 잘만 다니던데 우성이가 다니는 회사는 진정 가난해서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다. 우성은 그나마 버스가 회사 근처까지 다녀 다행이라며 혼자 위안을 삼는다.






광명사거리에서 눈에 익은 버스가 천천히 우회전한다. 반원 모양의 초록색으로 덮힌 화영운수다. 번호가 잘 보이지 않는다.

‘아~ 안경이라도 사야하나?’

요즘 들어 우성이의 눈이 자꾸 안 좋아 지는 모양이다. 우성은 짙고, 굵은 매력적인 눈썹을 찡그리며 실눈을 만든다. ‘12번’이라는 빨간 LED가 선명하다. 출근시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제법 빼곡하다. 운전석 뒷자리에서 두 다리 단단히 고정시키고 봉을 잡는다. 전에 버스가 급정거 하는 바람에 아무생각 없이 서있다 넘어져 제법 면이 팔린 후엔 버릇처럼 돼버렸다. 우성은 무얼 찾는 지 버스 안을 두리번거리기 시작한다. 눈이 침침해서 잘 보이지 않는다. 우성은 조금씩 사람들을 비집고 버스의 중간 자리로 가본다. 그리고 눈을 떼지 않고 버스 창문에 서리처럼 붙어있는 그를 보고 있다.

오늘은 우성이에게 특별한 날이다. 기형도 시인의 시가 ‘12번’ 버스에 실리는 날이기 때문이다.







3.

버스가 가볍게 흔들렸다. 세희는 눈을 뜨고 일어나 앞으로 쏠린 긴 생머리를 어깨 뒤로 넘겨 화사한 자신의 얼굴을 드러냈다. 약간의 음주로 붉어진 볼과 버스의 조명이 제법 잘 어울렸다. 창에는 철산역이라는 익숙한 간판이 스친다. 친구들과 가볍게 수다를 떨었을 뿐인데 벌써 밤 10시다. 세희는 잠에서 깨려는 듯 예쁜 큰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그리고 매끈한 얼굴라인을 긴 손가락으로 톡톡 치며 장난 짓을 시작한다. 창에 비친 그 모습이 제법 귀여워, 화장품 CF에 나오는 연예인 같다고 혼자 키득거리며, 버스 천장에 듬성듬성 실려 있는 광고를 읽기 시작한다.

‘요즘 경기가 안 좋긴 하구나. 광고가 거의 없네.’ 세희는 귀엽게 작은 입으로 하품하며, 눈에 들어온 이름 하나를 지긋이 바라본다. 어렴풋이 그 이름을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듯 했다. 낯설면서도 익숙한 느낌이다.

“기. 형. 도.”






세희는 입술을 씰룩거리며 조용히 불러본다. 기억해 보려 했지만 ‘기형도’라는 이름과 관련한 특별한 추억이 없었다. 궁금하긴 했지만, 오랜만에 버스 뒤로 지나가는 풍경을 감상하는 게 더 나을 듯 싶었다. 휴대폰을 꺼내 이어폰을 끼고, 요즘 가요를 들으며 스치듯 지나는 가로수를 눈으로 세고 있다. 하나. 둘. 셋. 버스가 빨라질수록 제법 머리가 아파져 쉽게 포기한다. 세희는 다시 눈을 감았지만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기형도가 누구지?’

집에 도착하니 남편과 아이는 자고 있었다. 세희는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하며 까치발로 작은 방에 조용히 들어가 노트북을 켰다.

광명시 온라인 시민필진인 세희는 필진 카페에 접속해 본다. 세희는 요즘 주변의 일들을 광명시 공식 블로그에 포스팅 하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주부로 살아온 지 벌써 4년. 가족 아닌 다른 누군가로부터 인정받는다는 건 정말 큰 활력소였다. 주부로서 살고 있는 지역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 생각하는 것도 꽤 뿌듯했다. 그리고 유입자 수가 꾸준히 늘어나며 자신의 블로그도 함께 커가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었다.

세희는 예전 인터넷 언론 ‘뽕을 빼주마’에서 미녀기자로 활동하던 때가 떠올랐다.

‘히힛. 그땐 여기저기 뽕을 뽑아주며 잘나갔었는데…’

세희는 아이디를 입력하고 카페에 로그인하며 혼자 키득거렸다.






필진 카페엔 카페지기인 유니 언니가 답글을 여기저기 달아 놨다. 필진 카페가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카페임에도 커뮤니티가 꽤 활성화 되어 있는 이유다. 운영자가 강제했다면, 자발성이 결여되어 애당초 발을 담그지도 않았을 거다. 카페 운영자가 필진들에게 자유를 준다하고 유니 언니에게 많은 부분을 맡기니 카페는 스스로 활기를 띄었다. 운영자는 보조수단 정도다. 가끔 얼굴 빼꼼거리며 공지사항 정도 남겨주고 나간다. 멋지다는 소문이 있지만 보고 싶진 않다. 인터넷에서 멋지다는 사람 현실에서 만나보면 실망만 클 뿐이라는 사실을 세희는 잘 알고 있었다.

세희는 머리를 흔들며, 잡념을 떨치고 익숙한 듯 이글저글에 댓글을 달며 신나하고 있었다. 뭔가 잊어버린 듯 하지만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하품을 하자 잠자리에 들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아! 기형도. 이게 뭐였지? 어디서 봤지?”

새벽 1시가 다 되어서야 세희는 갑자기 큰소리 치고는 자신도 놀랐는지 ‘어머. 어떻게’를 입술로 되내이며 혹시라도 남편과 아이가 깼을까 주변을 두리번 거린다. 그리고 검색창에 “기형도”를 입력해 본다. 여자란 참 신기한 존재다. 놀라면서도 할 일과 할 말을 동시에 한다.






‘기형도. 시인. 시가 낯설고 우울하단다. 가난, 죽음, 1989년 3월 9일 사망’

전체적으로 어두워 보였다. 왜 그랬을까? 90년대 그의 시를 읽지 않으면 문학을 얘기할 수 없다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유명한 사람인가 보다라고 넘기려다가...

‘어? 광명 소하동?’

세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광명을 배경으로 시를 썼다는 게 신기했다. 너무 궁금했고, 기형도를 조금 더 알고 싶어졌다.

세희는 스크롤을 아래로 내리며 빠르게 다른 정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벌써 수개월 지난 글이지만 유니 언니가 쓴 글을 보았다. 유니 언니는 당시 경기도 내의 버스회사들이 테마버스를 운영한다는 계획 아래 광명은 대표하는 인물로 ‘오리 이원익’을 선정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했었다. ‘오리 이원익’ 선생을 빼고서는 광명을 얘기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리 이원익’ 선생은 국가지정 보물 1435호 ‘이원익 초상’을 시작으로 경기도 지정 유형문화재 등이 10여 점 넘게 지정된 광명의 대표 인물이다. 세희는 그럴만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며칠 뒤 유니 언니는 이상한 댓글을 하나 남겼다.

‘어라? 광명 대표 인물로 기형도 시인이 됐네. 기형도가 누구지? 아시는 분 손!’

세희는 머리를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한다. 정리해보자. 경기도 내 테마버스에 광명의 화영운수는 광명의 인물로 처음에 ‘오리 이원익’ 선생으로 정했었다. 하지만 오늘 세희가 버스에서 본 건 기형도였다. 일반시민은 들어본 적 없는 ‘기형도’라는 인물이었다.






'향토문화재와도 전혀 관련 없는 기형도가 왜 거기 있지?'

이건 막판에 무슨 사연인지 바뀌었다는 얘기다. 물론 당시에는 지자체 홍보로 치부하고 그냥 넘어갔었으나 세희도 예전 기자 출신이다. 뭔가 석연치 않아 했던 부분이 있었다. 왜 '오리 이원익’이 기형도로 바뀌었을까. 세희는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갑자기 가슴이 쿵쾅거렸다.

뭔가 재밌는 일이 생겼을 거라는 느낌이 세희의 본능적인 기자의 감을 다시 한 번 세우게 했다.

1부.  끝.

출처 : 광명시민공동프로젝트 <바로가기 Clic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