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직장인 SNS/직장인 시민기자

[인물] 기형도 - 광명 그리고 유년시절


2011. 2. 9. MBC ‘황금어장-무릎팍도사’에 출연한 공지영은

“과거 아버지 덕분에 남달리 부유하게 살아 왔다”며, “대학 때 학생식당에서 밥 먹을 돈이 없다는 말이 거짓말인 줄 알았다”고 밝히고, 과거 대학시절 아나운서를 그만두고 참가한 연세문학회에서 故 기형도 시인과 소설가 성석제와 인연을 맺었지만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해 당시 대학생들의 가난함을 전혀 몰라 동료들에게 미움을 받기도 했다고 말한다.

그리고 공지영은 “가난에 대해 계속 모르고 살아오다가 기형도가 죽은 후 그의 책을 보고 가난의 끔찍함을 알게 됐다”며 먹먹한 심정을 토로했다.

닭큐는 문학을 전공하지도, 뛰어난 감수성을 지니지도 않았다. 이에 많은 부분을 관련 서적 및 논문에서 인용한 사실에 대하여 양해바란다. 그러나 닭큐도 기형도의 시를 읽으면 느껴지는 몇 가지는 공통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독하게도 가난했다는 것과 '죽음'에 대한 미묘한 감정이다. 기형도의 시에 대해 박상천은 '죽음 이후'는 없고, '죽음 그 자체'만 있다고 표현했다. 

김정화는 그의 시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기형도 시를 읽으면서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은 비극적인 세계에 대한 직시를 하면서도 항상 따뜻한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런 점이 바로 기형도 시가 지니는 탁월성이며, 기형도 시에서 등장하는 비극과 죽음의 어둠이 갖는 힘이라고 본다. 이런 부분에 대한 시적 뒷받침은 '엄마걱정'에서 잘 나타난다. 93p

기형도의 시 세계는 부정적이고 비극적인 세계를 그 기본으로 하고 있다. 그런데, 특이한 점은 그의 시에 있어 죽음이라는 사유는 세계와의 단절을 의미하는 재생 혹은 소멸의 죽음이라기 보다는 죽음으로 그 현실에 살아있는 존재의 의미를 되새김질하고 있다는 것이다. 시지프가 끊임없이 바퀴를 굴리며 그에게 주어진 퀘스트(quest)를 수행하면서 존재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듯이 기형도는 죽음을 세상을 살아가는 한 방편으로 삼았다는 특이점을 가지고 있다. 소멸이라는 죽음의 속성대로 사라짐이 아니라 세계 속에서의 시지프스로서 부활을 꿈 꾼 것이 기형도의 죽음이 갖는 동력이다. 97p


김정화 - 기형도 시의 죽음의 동력 연구(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 학위 논문 - 2002)


시인 기형도는 중앙일보 기자출신으로 1985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가 당선되어 문단에 공식 데뷔했다. 그는 정치적 색채로 가득한 민중시와 노동시가 주류를 이뤘던 당시에 묵시적인 언어와 독특한 상상력으로 자신만의 시 세계를 다져나갔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만 29세(만 30세를 6일 남기고)에 요절했다. 그리고 그가 처음으로 출간하려던 시집은 유고시집이 되어버렸다.

기형도는 '안개'에서 여직공의 겁탈 사건과 방죽 위에서 죽은 취객의 이야기를 사소한 사건이라고 말한다. 안개 속의 일들은 늘 있을 수 있는 일이라 담담하게 말하는 것이다. 공장굴뚝이 활발하게 피어나던 그 시대가 그랬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나에게 더 큰 감정을 일게하는 역할을 한다. 죽음의 담담함. 그 참담함.


광명중앙도서관 휴게실에서

 
기형도 연보

그의 작품은 유고시집 '입 속의 검은 잎'에 실린 시 61편을 비롯하여 '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에 실린 16편, 미발표 시 20편 등 총 97편이다. 그의 시는 많은 문학 입문자들의 필독서로 읽히고 있다.

시인 기형도의 시를 접하기 전, 그의 유년시절을 살펴 보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된다. 유년시절의 가난과 상실의 비극은 아버지의 죽음(위험한 가계 1969)으로부터 시작되며,그 뒤로 누이(나리 나리 개나리)와 삼촌의 죽음(삼촌의 죽음)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그의 시에서 아버지는 80년대의 폭력과 억압의 아버지가 아닌 또 다른 시대의 희생물로 '불쌍하게' 그려지고 있다.

또한 당시 농촌이었던(현재는 주변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섰다) 소하동과 공장지대가 밀집한 서울의 경계에 있던 주변의 환경 등을 살피는 것도 중요하다. 그의 자연에 대한 이야기는 소하동이 배경이랄 수 있는 부분이 많다. 위의 '안개'가 대표적이다.

이에 [
기형도 전집]
과 [기형도 산문집 - 짧은 여행의 기록]를 주로 참조하여 그의 연보와 함께 당시 시대상황을 말하는 것도 나름 의의가 있을 것 같아 이를 정리해 본다.


1960년 3월 13일(음력 2월 16일 生)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 392번지에서 출생. 3남 4녀 중 막내. 부친(기우민)의 고향은 황해도 벽성군(연평도가 보임). 6. 25를 만나 당시 황해도 피난민의 주이동로인 연평도로 건너 옴. 면사무소에서 근무해 전쟁이 끝난 후에 대부분의 피난민이 섬을 떠난 것과는 달리 이곳에 정착함.

* 3. 15. 정부통령 선거(리승만, 리기붕)
* 4. 11. 김주열 군 시체 발견으로 2차 마산 시위
* 4. 19. 시위
* 4. 26. 이승만 하야

1964년 일가족이 연평을 떠나 경기도 시흥군 소하리(현 광명시 소하동 701-6)로 이사. 소하리는 급속한 산업화에 밀린 철거민, 수재민들의 정착지가 되기도 했고, 도시 배후의 근교 농업이 성한 농촌이었음.

* 9월 베트남 파병 시작

1965년 여섯살 무렵에는 한자 투성이인 신문을 읽어 '신동' 소리를 듣게 됨. 1985년 신춘문예 시부문 당선작인 '안개'는 소하리가 배경임. 아직까지 도시 배후의 전형적인 농촌의 모습을 가지고 있음(* 1990년 3월 1일 초판, 기형도 산문집 - 짧은 여행의 기록에서 발췌).

1967년 시흥초등학교 입학. 상장을 라면 박스에 담을 정도로 많이 탄 그의 성적은 늘 최상위권이었음.

1968년 부친이 직접
지은 집에서 가족이 살게 됨. 성실히 농사를 꾸려나가 집안은 유복한 편에 속함.

1969년 부친이 중풍(*뇌졸중)으로 쓰러짐. 모친 (장옥순)이 생계 일선에 나섬.

*  "그해 늦봄 아버지는 유리병 속에서 알약이 쏟아지듯 힘없이 쓰러지셨다"('위험한 가계 1969'에서), "열무 삼십단을 이고/시장에 간 우리 엄마/안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엄마 안 온시네"('엄마 걱정'에서) 등의 시는 이 무렵의 체험이 시화됨.

1975년 5월, 바로 위 셋째 누이(당시 고2)가 불의의 사고로 죽음. 이 사건이 깊은 상흔을 남기고, 이 무렵부터 시를 쓰기 시작함.

* "어느 날의 잔잔한 어둠이/이파리 하나 피우지 못한 노의 생애를/소리없이 꺾어갔던 그 투명한/기억을 향하여 봄이 왔다"('나리 나리 개나리'에서)

* 4. 8. 인혁당 관계자 사형선고
* 5. 13. 긴급조치 9호 선포

1976년 신림중 수석 졸업(1회), 중앙고 입학. 교내 중창단 활동, 백일장 등에서 두각

1979년 중앙고 수석 졸업. 연세대 정법대 정법계열 입합. 교내 문학서클 '연세문학회'에 입회. 12월 교내 신문인 '연세춘추'에서 시상하는 '박영준문학상'에 '영하의 바람'으로 가작 입선

*12. 12. 전두환 등 신군부 쿠데타

1980년 정법계열에서 정치외교학과로 진학. 농성과 교내 시위에 가담. 교내지에 '노마네 마을의 개'를 기고하여 형사로부터 조사 받음.

* 5. 18. 광주민주화운동

1981년 7월 방위 소집되어 안양 인근 부대에서 근무. 초기작의 대부분을 이 시기에 쓰고, 습작을 정리.

1982년 2월 전역. 이 시기 다수의 시, 소설을 씀.

1984년 10월 중앙일보사 입사.

1985년 1월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 '안개'로 당선. 중앙일보 정치부로 배속.

1986년 당시 인기 있던 정치부에서 다소 등한시 되었던 문화부로 자진하여 옮김


1988년 여행. '물속의 사막', '추억에 대한 경멸', '정거장에서의 충고' 등 발표

1989년 '질투는 나의 힘' 등 발표(동명 영화제목의 모티브가 되었음). 가을에 시집을 출간하기 위하여 준비하던 중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파고다극장에서 숨진 채 발견 됨. 사인은 뇌졸중. 이 때 만 29세. 시작메모로 채워진 푸른 노트, 이국에서 온 몇 통의 편지, 꼼꼼히 줄쳐 읽던 몇 권의 책과 소화제 알약이 든 가방을 가지고 있었음. 

3월 9일, 경기도 안성 소재 천주교 공원묘지에 묻힘. 5월, 유고 시집 '입 속의 검은 잎' 출간함. 

* 시집의 제목은 평론가 김현이 정했으며, 김현은 당시 기형도의 절친한 신문사 동료였음.


 
광명 시인 기형도를 꺼내다.

시인 기형도의 출생 및 '안개'의 배경이 된 광명시 소하동에 대한 당시 정황에 관하여는 문관규의 논문에 잘 드러나므로 그대로 옮겨본다.

시인 기형도는 1960년 2월 16일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 392번지에서 출생하였다[각주 : 성석제가 정리한 연보에 의하면 옹진군 연평리 392번지가 출생지로 되어 있다. 그러나 학적부와 주민등록표에는 경기도 시흥군 서면 일직 3리와 경기도 시흥군 서면 일직리 1번지로 표기되어 있다. 일직리는 1981년 7월 1일부터 시승격에 따른 행정구역 변경으로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701-6번지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기애도(* 기형도의 누나)의 증언에 의하면 경기도 옹진군 연평리 392번지는 원적지이며, 기형도는 1960년 음력 2월 16일 해질 무렵 태어났다고 한다. 소하리에는 1964년 이주해 왔으며 학적부와 주민등록표 상에 나타난 일직리 1번지와 소하동 701-6번지는 동일한 지명이며, 이 곳에서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1964년 9월 시흥군 소하리로 이주하여 이곳에서 유년과 청년시절을 보낸다. 소하리는 서울과 시흥(현 광명시)이 안양천을 경계로 분할된 경기도 쪽에 위치해 있다. 안양천은 서울과 경기도라는 행정 구역상의 분할 뿐만 아니라 대한전선, 삼천리표 연탄공장 등 공장지대가 밀집되어 있는 서울과 무와 배추를 재배하여 생활하는 농촌 성격의 소하리로 생활권을 구분해 주기도 한다. 기형도의 신춘 문예 등단 작품인 '안개'는 이와 같은 소하리 부근의 정경을 세세하게 보여주고 있다ㅏ. '아침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는 구절은 경기도와 서울의 경계를 흐르고 있는 안양천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총신으로 표현되고 있음을 통해 소하리와 안양천 일대가 작품 '안개'의 배경이 되었음을 확인해 볼 수 있다.

부친은 공직 생활과 정당 활동 및 간척 사업 등을 전전하다가 중풍으로 눕게 된다. 부친의 장기에 걸친 투병 생활로 인해 가족 모두가 생계 전선에 나서게 된다. 이후로 가난은 일상 생활의 모습으로 자리를 잡게 되며, 유년을 다루는 그의 시편 속에서 가난은 지적 화자의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모티브로 빈번하게 등장하고 있다.


문관규 - 기형도 시 연구(서울시립대학교대학원 - 석사학위논문, 1997년 2월) 1면


위험한 가계는 아버지의 병환으로 인한 약값으로의 과다한 지출이 위험한 가계를 만들고, 그에 따른 어렵고, 가난한 유년시절을 짐작해 볼 수 있는 내용이 많다.

'어머니. 잠바 하나 사주세요. 스펀지마다 숭숭 구멍이 났어요. 그래도 올 겨울은 넘길 수 있을 게다', '나는 오징어가 먹고 싶어. 그건 오래 씹을 수 있고 맛도 좋으니까', '아버지 좀 보세요. 어떤 약도 듣지 않았잖아요. 아프시기 전에도 아무것도 해논 일이 없구. 어머니가 누이의 뺨을 쳤다.'... '위험한 가계 1969 中


광명시중앙도서관 3층에는 기형도 부스가 따로 마련되어 있다. 이 곳에서 그의 사진과 함께 그에 대한 각종 논문, 서적들을 볼 수 있다.

 '정거장에서의 충고' 중앙도서관 청구기호811.609-ㅂ568ㅈ
'입 속의 검은 잎' 중앙도서관 청구기호 811.6-ㄱ637ㅇ


 

기형도, 그의 유년시절을 추억하다.

 
시인 기형도의 주소는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701-6번지다. 그를 만나기가 쉽지는 않았다. 그 지역에 사시는 동네 아주머니도 기형도라는 이름을 낯설어 했다. 근처의 고물상을 찾았다. 고물상의 주소는 소하동 700-1번지.

사진 오른쪽 철조망 부근이 701-6번지.

이 근처는 재개발이 확정되었단다. 보상이 모두 끝난 지역이다. 한참을 헤매고 나서야 시청 지적과에 전화한다. 통화로 현재 위치가 광명에서 서울로 넘어가는 기아대교 시작점임과 그 오른편에 서 있음을 알렸다. 지적과에서는 그 부근이 701-6번지가 맞다고 한다.



아무리 봐도 집은 위에 보이는 게 전부였다. 답답한 마음에 지역 동사무소를 찾았다. 전산화가 잘 되어 있어 지번으로 701-6번지를 확인할 수 있었다. 동사무소 직원은 기형도를 알았다. 그러나 지금 묻는 지번이 어딘지는 몰랐다. 지금은 재개발이 예정된 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를 기억하는 이는 없었다.


 위 사진의 노란부분이 경기도 광명시 소하동 701-6번지이다.

  

시인 기형도는 지금도 흐르고 있고, 그 때에도 흘렀을 안양천의 '안개' 속에서 생활했다.



우리의 유년시절의 기억은 대부분 행복하기만 하다. 그러나 기형도의 시는 그의 유년시절이 어둡고, 우울하였음을 보여준다. '물속의 사막', '위험한 가계'가 대표적이다. 이 외에도 그의 유고시집인 '입 속의 검은 잎'에서 많은 부분이 그이 우울한 시절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다행히 그의 시에는 자연에 대한 동경이 있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몇 편의 논문을 살피었는 데 그 중 시와 자연과의 공감에 대한  박연선(기형도 시 연구, 서강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1998)의 글에 대한 고성만의 평가를 인용해 본다.

박연선은 기형도의 시를 이미지적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는데, 크게 '심상론, 주제론'의 두 부분으로 나눈 다음 원형적 심상과 대립적 심상으로 나누어 살핀다.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사계절과 '비와 눈, 안개 그리고 불과 바람' 등의 자연의 비유들은 삶과 존재에 지칠 때 그 지친 것들을 구원해 줄 수 있는 비유로 빈번히 등장한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기형도의 시가 불행과 비극을 이야기함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보다 깊고 풍부한 내용을 전하게 된다고 설명한다.


고성만(전남대학교 교육대학원 석사학위 논문, 2003)



지금은 다리가 놓이고, 아파트가 들어섰다.



풀사이로 무상한 시간의 지남만 보여준다.


 

저 장미꽃 사이로 시인 기형도가 살았던 옛 터가 있을거라 추측된다.



기억하고, 기억하고.




기형도의 죽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이미 예견된 죽음이라며, 기형도를 신격화 한다. 그러나 기형도를 개인적으로 알았던 시인 김영승은 2008년 문학사상 11월호에서 '지금이라면 찜질방에 갔을 것'이라고 반론한다. 신화가 아닌 글만으로 그를 보자는 의미라고 한다.

그의 시 중 어느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는 것은 잔인한 일이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빈집'을 통해 기형도가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다고 평가하고 있는바, 이를 한 번 기억하자. 그리고 그가 처음 세상에 '기형도'라는 이름을 기억시킨 '안개'의 전문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빈 집

사랑을 일고 나는 쓰네

잘 있거라, 짧았던 밤들아
창밖을 떠돌던 겨울 안개들아
아무것도 모르던 촛불들아, 잘 있거라
공포를 기다리던 횐 종이들아
망설임을 대신하던 눈물들아
잘 있거라,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열망들아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
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

 

안 개

 
1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2

이 읍에 처음 와본 사람은 누구나

거대한 안개의 강을 거쳐야 한다.

앞서간 일행들이 천천히 지워질 때까지

쓸쓸한 가축들처럼 그들은

그 긴 방죽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문득 저 홀로 안개의 빈 구멍 속에

갇혀 있음을 느끼고 경악할 때까지.


어떤 날은 두꺼운 공중의 종잇장 위에

노랗고 딱딱한 태양이 걸리 때까지

안개의 軍團(군단)은 샛강에서 한 발자국도 이동하지 않는다.

출근길에 늦은 여공들은 깔깔거리며 지나가고

긴 어둠에서 풀려나는 검고 무뚝뚝한 나무들 사이로

아이들은 느릿느릿 새어나오는 것이다.


안개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처음 얼마 동안

보행의 경계심을 늦추는 법이 없지만, 곧 남들처러

안개 속을 이리저리 뚫고 다닌다. 습관이란

참으로 편리한 것이다. 쉽게 안개와 식구가 되고

멀리 송전탑이 희미한 동체를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미친 듯이 흘러다닌다.


가끔씩 안개가 끼지 않는 날이면

방죽 위로 걸어가는 얼굴들은 모두 낯설다. 서로를 경계하며

바쁘게 지나가고, 맑고 쓸쓸한 아침들은 그러나

아주 드물다. 이곳은 안개의 聖域(성역)이기 때문이다.

 

날이 어두워지면 안개는 샛강 위에

한 겹씩 그의 빠른 옷을 벗어놓는다. 순식간에 공기는

희고 딱딱한 액체로 가득찬다. 그 속으로

식물들, 공장들이 빨려 들어가고

서너 걸음 앞선 한 사내의 반쪽이 안개에 잘린다.

 

몇 가지 사소한 사건도 있었다.

한밤중에 여직공 하나가 겁탈당했다.

기숙사와 가까운 곳이었으나 그녀의 입이 막히자

그것으로 끝이었다. 지난 겨울엔

방죽 위에서 醉客(취객) 하나가 얼어 죽었다.

바로 곁을 지난 삼륜차는 그것이

쓰레기 더미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것은

개인적인 불행일 뿐, 안개의 탓은 아니다.

 

안개가 걷히고 정오 가까이

공장의 검은 굴뚝들은 일제히 하늘을 향해

젖은 銃身(총신)을 겨눈다. 상처입은 몇몇 사내들은

험악한 욕설을 해대며 이 폐수의 고장을 떠나갔지만

재빨리 사라들의 기억에서 밀려났다. 그 누구도

다시 읍으로 돌아온 사람은 없었기 때문이다.

  3

아침 저녁으로 샛강에 자욱이 안개가 낀다.

안개는 그 읍의 명물이다.

누구나 조그씩은 안개의 주식을 갖고 있다.

여공들의 얼굴은 희고 아름다우며

아이들은 무럭무럭 자라 모두들 공장으로 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