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예. 제가 범인 맞습니다. 화영운수에서 알려 주지 않던가요? 저를 굉장히 싫어할텐데. 하하하!"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제가 바꿨습니다. 그 인쇄 디자인. 제가 모조리 다 바꿨습니다. 화영운수나 시청 측에서 분명 '이원익' 오더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제가 모든 것을 '기형도'로 바꿔버렸단 말입니다. 아, 소개가 늦었습니다. 저는 신우성이라고 합니다."
사내의 입 밖으로 나온 말에 세희는 깜짝 놀랐다. 자신이 범인이라 당당히 말하고, 말을 이어가는 그를 보며 어안이 벙벙했지만 세희는 조용히 귀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저는 형도 형을 잘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저 보다 17살이나 많던 터라 아저씨라 하는 게 더 어울릴 수도 있지만, 같은 동네에 살면서 가끔 만나던 형은 저의 우상과도 같은 존재였습니다. 작문실력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공부도 잘 해서 저희 어머니는 항상 기가 죽어있기 일쑤였지요.
제가 막 초등학생이던 되던 즈음에 형이 기자가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언제나 딱지치기, 비석치기, 돈가스 등을 하며 여느 아이들과 다름없이 지내고 있었는데, 그해 형은 저에게 오래된 노트 하나를 줬습니다. 그땐 그게 뭔지 몰랐지요. 알 수 없는 메모들만 잔뜩 적힌 노트였는데 제가 4학년이 되면서부터 그게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형의 습작노트였어요.
그 이후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학교에서 칭찬을 받기 시작한 게. 교내에서 제법 큰 문학 경시대회에서 여러 차례 수상을 하곤 했습니다. 중학교 때도, 고등학교 때도 많은 선생님들이 '넌 나중에 작가'가 되라는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저는 단지 형도 형의 시를 베꼈을 뿐인데 말이죠.
지금 생각하면 부끄러운 이야기죠. 남의 노트 하나로 인해 제 미래가 좌우되다니….
알 수 없는 의무감과 죄책감으로 시를 공부하기도 했습니다. 그 외에는 그저 평범한 학생으로 지내다가 아무 탈 없이 고등학교를 졸업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되지만 그땐 다른 선택 폭이 없다고 여기고 국문학을 선택해 대학에 들어갔습니다. 서당개 삼년이면 풍월을 읊는대나. 의외로 교수님들께서 제 작품에 대해 많은 부분 인정해주시긴 했어요.
하지만 그것도 잠시. 시간이 지날수록 제 실력이 바닥나기 시작하더군요. 국문학을 하지 말았어야했었어요. 매일 같이 글을 쓰려니 정신적인 고문이라고 여길 정도로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과거 칭찬 받으며 지내온 날들이 부끄럽게 느껴졌어요.
그리고 저는 결국 형도 형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형이 제게 그 노트를 준 의미는 아직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전 그것 덕에 잠시나마 행복에 빠졌었고, 주변의 기대를 한껏 받아 보기도 했습니다. 물론 제 한계를 넘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작가의 길을 포기한 후, 출판사에 근무하다가 결국 오게 된 곳이 바로 여기, 한결 인쇄소입니다.
그런데 얼마전 우연히 이곳으로 형도 형과 관련된 인쇄물 작업이 들어왔습니다. 제법 규모도 커서 김계장 말에 의하면 광명시 버스에 걸 수도 있다더군요. 저는 그때 제법 흥분했었는데 마지막 오더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내려졌지요. 이원익이란 인물로 결정됐으니 급히 준비하고 3일 내로 1차 인쇄 마치라고요.
그것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사적인 감정으로 형도 형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날은 저도 어쩌다 그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그럴 때 있지 않나요? 갑자기 사고치고 싶은. 하하.
마침 제가 디자인이랑 필름 담당이거든요. 인쇄소 사람들에게 필름 뿌리면 그걸로 끝인겁니다.
저는 기형도 사진이랑 시가 담긴 파일을 밤새 작업해 화영운수 오더인양 인쇄를 시작했습니다. 물론 사장님도 그때까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한 일이었습니다.
나중에서야 스스로 사표를 들고 사장님을 찾아갔죠. 연신 죄송하다며 고개만 숙이고 있었습니다. 그때 사장님이 웃으면서 그러더군요.
'처음엔 화 많이 났다. 여기저기 참 많이도 불려다녔어. 그런데 우성아! 예전에 난 네가 좋아하는 일이 전혀 없는 줄 알았다. 우리 함께 일한지 참 오래됐지만 얼굴 잘 생기고, 일 잘 하면서도 애가 왜 저렇게 밋밋할까라고 생각했었거든. 근데 곰곰이 되짚어 보니 넌 그 일이 있은 후로 항상 웃고 있었어. 사장 속 타는 줄은 모르고 말야.
암튼 너한테 돈 달래봤자 가진 거 쥐뿔도 없을 테고, 마침 장사도 안되는 마당에 근근이 먹고 살던 거 과감하게 정리해볼까도 했었다. 평소에 우리 자주 먹었던 순댓국이나 팔면서 여유있게 웃으며 살아볼까 생각했어.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게 내 천직이더라. 벗어날 수가 없어. 그런데 나 혼자 꾸려 가는 건 도저히 감당히 안돼. 그러니 너도 그냥 남아 있어라.
대신 지은 죄가 큰 건 분명하니 내가 좋아하는 순대국이나 한그릇 사.'
라고요."
8.
우성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인쇄소를 나온 세희는 푸른하늘을 올려봤다. 세희의 큰 눈에 바다가 빠질 것처럼 세희의 눈동자도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아버지가 찾던 사람이 분명해.'
세희는 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를 떠올렸다. 세희는 국문학 교수였던 아버지에게 학부에 요즘 세대 같지 않은 남다른 정서를 가지고 글을 쓰는 남학생이 한명 있다는 말을 수차례 들은 바 있었다. 그 학생은 잘생긴 외모와는 달리 항상 무언가에 쫓기듯 불안해하고 자신감이 없어 보였다고 한다. 세희 아버지는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관심을 갖고 그에 관해 알아보던 중 그 낡은 노트의 비밀을 알게 되었다.
세희 아버지는 뒤늦게 그를 찾기 위해 수소문했으나 이미 도망치듯 어디론가 사라진 후였다. 아버지는 이 말을 꼭 해주고 싶었다고 말하곤 했다.
"자기 자신을 믿고 이제 그 노트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이미 그 노트는 자네를 충분히 가르쳐 주었어. 자네에게는 제2의 기형도가 될만한 재능이 있다네."
오래 전에 들은 이야기라 어렴풋한 기억이긴 하지만, 세희는 우성이 그가 맞다는 확신이 들었다.
세희는 곧바로 아버지와 통화를 했다. 아득한 저 너머로 껄껄 웃음 소리를 들으면서 세희는 그가 다시 도망치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바랬다. 그리고 문득 유니 언니가 알려준 기형도 시비가 생각난 세희는 광명시민체육관으로 향했다.
세희는 그곳에 서 있는 기형도 시비를 바라보면서 오늘 들은 이야기를 블로그에 쓰고, 소설로 각색해 올린다면 제법 재밌을 것이라 생각했다. 세희는 '나중에 나를 묘사한다면 초절정 미녀로 만들어야지'라고 다짐하며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세희는 또다시 화영운수 12번 버스에 올라탄다.
9.
퇴근길에 직장인들이 묵묵히 버스에 실려 지나간다. 긴 업무에서 깨어난 건조한 회색 얼굴들 사이로 한숨이 쉴새 없이 새어나온다. 그들은 이미 익숙한 듯 한숨을 도로 들이마시며 느릿느릿 버스문에서 새어나온다.
그리고 안양천은 지금도 안개가 자욱하다.
퇴근길에 직장인들이 묵묵히 버스에 실려 지나간다. 긴 업무에서 깨어난 건조한 회색 얼굴들 사이로 한숨이 쉴새 없이 새어나온다. 그들은 이미 익숙한 듯 한숨을 도로 들이마시며 느릿느릿 버스문에서 새어나온다.
그리고 안양천은 지금도 안개가 자욱하다.
- 完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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