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직장인 SNS/직장인 닭큐의 시선

[여행] 충남 서산의 해미읍성(천주교 신자들의 순교지)

서산 해미읍성(瑞山 海美邑城)




종           목 : 사적 제116호
수 량 / 면 적 : 194,102.24㎡
지정(등록) : 1963.01.21
소    재    지 : 충남 서산시 해미면 읍내리 16
시           대 : 조선시대

가족들과 약 1시간 정도면 돌아볼 수 있는 정도이다. 왜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후일 천주교인들에 대한 박해의 장소로 더 유명하다.

해미읍성의 진남문. 정문이다.

왜적의 침입을 효율적으로 막기위한 수로를 설치.(사진 문화재청)


서산 해미읍성

고려 말부터 국정이 혼란한 틈을 타서 왜구가 해안지방에 침입하여 막대한 피해를 입히는 바, 이를 효과적으로 제압하기 위하여 조선 태종17년(1417)부터 세종3년(1421) 사이에 당시 덕산(德山)에 있던 충청병마도절제사영(忠淸兵馬都節制使營)을 이 곳에 옮기고자 축성(築城)되었으며, 효종3년(1652)에 병마절도사영(兵馬節度使營)이 청주로 옮겨가기 전까지 230여 년간 군사권을 행사하던 성으로 있다가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설되고 해미현의 관아가 이 성으로 옮겨졌으며,1914년까지 겸영장(兼營將)이 배치되는 호서좌영으로서 내포지방의 군사권을 행사하던 곳이었다.

해발 130m인 북동쪽의 낮은 구릉에 넓은 평지를 포용하여 축조된 성으로서, 성벽의 아랫부분은 큰 석재를 사용하고 위로 오를수록 크기가 작은 석재를 사용하여 쌓았다. 성벽의 높이는 4.9m로서 안쪽은 흙으로 내탁되었으며 성벽 상부 폭은 2.1m 정도이다. 성문은 동·서·남·북 4곳에 있는데 네모지게 잘 다듬은 무사석(武砂石)으로 쌓았으며, 주 출입구인 남문은 아치모양의 홍예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읍성에는 동헌을 비롯하여 아사(衙舍) 및 작청(作廳) 등의 건물들이 빼곡히 있었으며, 천주교 박해와 관련된 유적도 일부 남아 있다. 1974년에 동문·서문이 복원되었고, 1981년 성내 일부를 발굴한 결과 현재의 동헌 서쪽에서 객사와, 현재의 아문 서쪽 30m 지점에서 옛 아문지가 확인되었고, 관아외곽석장기지(官衙外廓石牆基址)가 발견되었다. 성의 둘레에는 적이 쉽게 접근하지 못하도록 탱자나무를 돌려 심어서 탱자성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자료출처 : 문화재청]

  

진남문 오른편에 해미읍성에 대한 안내판이 있다.
 

 

해미읍성의 진남문으로 향하는 중...



해미읍성의 전경


해미읍성의 안내도.



*참고로 충남 서산시는 2011. 8. 8자로 사적 제116호인 해미읍성을 전국적인 연날리기 명소로 키울 계획이라고 밝혔다.

해미읍성은 해양성 기후가 속한 지역으로 연중 바람이 많고, 넓은 잔디밭을 보유해 연날리기에 좋은 여건이라고 하며, 희귀연이나 창작연 공모전도 실시할 예정이고, 이렇게 개발한 연을 기네스북에 등재하고 전국 연날리기 대회를 열어 해미읍성 활성화에도 박차를 가할 방침이란다.



[신기전기화차] 조선시대 문종1년(1451) 처음 제작되었으며, 신기전 100발을 장전한 후 이를 동시 내지는 연속적으로 발사할 수 있는 일종의 다연장 로켓으로 여러 전투에서 큰 전과를 거두었다. 제작 당시의 설계도가 남아있는 것 중엣 가장 오래된 병기이다.

[불랑기] 서양에서 만들어져 중국으로 전해진 서양제 화기로 임진왜란 때 명나라 원군이 가져와 전투에 사용하였다. 여러 개의 자포를 연속 사격할 수 있는 매우 발전된 신식 무기이다.

* 임진왜란 : 조선 선조 25년(1592)부터 31년(1598)까지 2차에 걸쳐서 우리나라를 침입한 일본과의 싸움. 해상에서의 이순신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육상에서 이일, 신립 등이 계속 패배함으로써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였으며, 뒤에 명나라의 원병과 권율 등의 반격으로 일단 화의가 되었으나 일군(日軍)은 선조 30년(1597)에 재침하여 31년에 물러갔다. (출처 : 다음 국어사전)




[옥사] 해미읍성은 우리나라의 천주교와 깊은 연관이 있는 곳이다. 교도들을 투옥하고, 문초하였던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터만 남아 있던 옥사를 발굴 작업 뒤 복원, 재현하였다. 1935년에 간행된 '해미 순교자 약사'의 기록을 토대로 복원하였으며, 내옥과 외옥이 있고, 각각 정면 3칸 건물로 남녀의 옥사가 구분되어 있다. 1790년부터 100여 년간 수 많은 천주교 신자들을 국사범으로 규정하여 이곳에서 투옥 및 처형하였는데,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도 이곳에서 옥고를 치르고 순교 했다고 전해진다.

동헌의 옆에 위치한 주거지역. 안내인의 설명을 들어보니, 첫째부인은 원래 거주지에 있고, 이곳에는 대부분 첩과 생활하였다 한다. 



안을 보면 꽤 넓다는 것을 알 수 있다.